애플에서의 500일, 아멜리오의 흥망성쇄


500 Days at the Helm: The Rise and Fall of Gil Amelio
Tom Hormby
2005.12.21

길 아멜리오(Gil Amelio)는 전에 Fairchild 중역이었던 마이크 스코트(Mike Scott) 이후로 제일 애플 CEO답지 않은 애플 CEO였다. 아멜리오는 National Semiconductor에서 회사를 재기시키는 명성을 얻었다. 이 회사의 CEO로서 아멜리오는 회사를 거의 신용이 없는 삼류 회사에서 신용 있는 일류 회사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경영인이기 전에 그는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연구자였다. 동료와 함께 그는 모든 스캐너와 캠코더, 디지탈 카메라의 기본인 CCD를 발명했었다. 

1994년 당시 National Semiconductor는 애플에 상당한 물량을 공급했었다. 따라서 헤드헌팅 회사인 Heidrich & Struggles에서 아멜리오에게 애플 이사직을 제의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칩 공급업체 경영자를 모셔오는 일이 큰 스캔들로 비화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 테크 붐일 때에는 공급대상 업체를 돕기 위해 공급업체에서 자리를 옮기는 일이 흔했다. 

Spindler’s Last Gap

불명확했던 달이 몇 달 지나간 후, 아멜리오는 애플 공동 창립자, 마이크 마큘라(Mike Markkula)로부터 이사진 초대를 공식적으로 받았다. 그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처음 그가 참석한 이사진 회의는 뉴욕의 19세기식 클럽에서 열렸다. 

그런데 아멜리오가 이사가 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암운이 들이닥쳤다. 스티브 잡스가 수수께끼같은 보이스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한 번 찾아 뵙고 싶습니다.” 아멜리오는 아무래도 잡스가 공동 창립자이니 이런 요구 정도는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정을 잡아 놓았다. 

짧은 대화 시간 동안, 잡스는 자기만이 애플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애플을 다른 인수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면서 자기 얘기만 늘어 놓았다. 잡스의 말에 끌린 아멜리오는 그 계획을 좀 더 이야기해해보라 종용하였으나, 잡스는 대강의 윤곽만 이야기 해 주었다. 

따라서 잡스로부터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만남의 결과였다. 그에게는 500여 일동안 별다른 생각이 없었고, 그 후 잡스가 드라마같은 쿠데타를 통해 아멜리오를 밀어낸다. 

잡스와의 만남에 동요받지 않은 아멜리오는 팔로 알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부인 샬린(Charlene)과 기묘한 사건을 목도하게 된다. 

아멜리오는 애플 이사진을 통제할 권한이 없음에 충격을 받았다. 이사진이 이사진의 역할을 거의 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사진은 CEO인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에 대해 거의 의문을 던지지 않았고, 애플에 깔려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연구를 하지 않고 있었다. 

Spindler’s Demise

대신 수식 경영자들은 이사진 회의 때마다 성공적인 제품 발표와 잘나가는 매출량이라는 장미빛 청사진만 그려냈었다. 그러나 저렴한 맥으로 시장을 채우겠다는 스핀들러의 전략은 애플의 기반을 분명 해치고 있었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주요 애플 소매상들마저 애플에게 적을 지게 하고 있었다. 

스핀들러 정책의 결과, 싸구려 맥들은 더 싸구려 PC들과 나란히 전시가 되었고, 맥 오에스 최대의 장점인 쉽다는 장점이 표시가 안났다. 

아멜리오가 참석한 두 번째 이사진 회의에서는 스핀들러의 발표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잘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수받아야 합니다.” 

과거에도 애플은 몇 건인가 인수 추문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존 스컬리의 임기가 막바지이던, 몇 년 전만 하더라도 IBM으로부터의 인수 제안은 최종 언론보도문안까지 나온 상태였으나, 최후의 몇 분 전에 취소가 된 적도 있었다. 

이번에 애플은 새로운 인수자를 찾고 있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짐 칼튼(Jim Carlton)은 게잇웨이2000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고려 대상에 올라 있다고 보도하였으나, 그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는 않았다. 

10월 1일 시작된 새 회계년도동안은 애플에게 있어서 재앙이었다. 스핀들러는 애플이 1억 5천만 달러의 흑자를 보이리라고 주장해왔으나, 싸구려 맥으로 시장을 덮겠다는 그의 전략 실수로 인해 애플의 적자는 6900만 달러를 넘을 전망이었다. 

스핀들러는 가격 인하와 이윤 마진의 지나친 절감을 이유로, 미국 지부장이자 자신의 한 팔인 짐 버클리(Jim Buckley)를 해고하였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더 심각해졌다. 스핀들러는 애플이 10억 달러 이상의 안 팔린 제품을 채널에 갖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 재고는 기본적으로 장부에서 때 내어야 했다. 

따라서 당시 애플이 올린 60억 달러의 매출 중 1/6이 잘라져 나갔다. 이정도가 되자 드디어 이사진이 움직였다.

Amelio’s Ascent 

스핀들러는 그 소식을 12월 1일 이사진 회의 때 의제에 올렸고, 반응은 안 좋았다. 하지만 누구도 스핀들러보고 그만두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고, 짐 버클리의 퇴출에 안심한 이사도 없었다. 그 대신 인수자 물색 작업은 좀 더 박차가 가해졌다. 애플의 CFO, 조 그라찌아노(Joe Graziano)는 썬과 협상이 진행중에 있다면서 폭탄발표를 하였다. 썬은 당시 애플을 주당 23 달러에 인수하고 싶어 했는데,이 가격은 당시 거래가보다 8 달러가 더 낮았다. 이 가격에도 흥미를 보이는 이사들이 있었지만, 아멜리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애플 주주들이 그런 가격을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확신하였다. 

게다가 단순한 인수만으로는 애플의 문제를 고칠 수 없었다. 특히나 썬이 인수한다 하더라도 썬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의 경험이 없었다. 

아멜리오는 구두로 그라찌아노를 물러나게 했고, 다른 이사진들에게는 그런 싸구려 계약을 생각도 말라 하였다. 그는 무관심했던 그룹을 일깨워서는 스핀들러가 물러나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말하였다. 

이 회의 이후, 피터 크리스프(Peter Crisp)는 아멜리오 편으로 합류하였다. 크리스프는 애플 초기 주주 중 하나였으며, 그의 벤쳐자본 회사인 Venrock(Rockefeller가 자금을 댔다)은 애플의 두 번째 외부 투자사였으며, 여기에 애플은 25만 달러를 투자하였다. 이제 가장 존경받는 이사 중 한 명이 제안을 하자 아멜리오는 거부할 수 없었다. 크리스프는 스핀들러 대신 아멜리오를 CEO로 앉히기 원하였다. 

아멜리오는 크리스프에게 확답을 피했으나, 고려는 해 보겠다 일러두었다. 이틀 후, 아멜리오는 원래의 National Semiconductor CEO의 자격으로 중국을 8 일동안 여행하였다. 여행중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가 도착하면 아마도 애플 CEO 자리를 받아들이리라 보도하였다. 

아멜리오가 돌아오자, 그는 크리스프에게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겠노라 말하였고, 결국은 20만 달러의 연봉 인상과 스톡옵션, 그리고 백 만 달러 어치의 주식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그가 CEO에 오르기 전에 언론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마이클 스핀들러가 여전히 CEO 자리에 있었다는 문제다.

1월 31일 뉴욕에서 다시 열린 이사진 회의에서는 썬에 대해 표면상의 최정 결정을 내렸다. 이제 그의 운이 점점 다해가고 있었기에, 스핀들러는 이사진 회의에 부인까지 데려와서, 회의 후 부인과 관광까지 할 계획을 세워 두었다. 

사장인 마이크 마큘라는 스핀들러에게 내려올 것을 요구하였고, 그에게 이사진 연설을 허락하였다. 스핀들러의 연설은 합병 이야기에 거의 국한되어 있었으며, 이사진들에게 썬이 제안한 계약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였다.

이사진은 거부하였고, 아멜리오는 마큘라와 함께 그의 개인용 비행기로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A Company in Chaos

정식으로 쓰여진 계약서는 없었지만, 아멜리오는 다음 날부터 출근하였다. 주차장을 헤맨 지 15분 후에, 아멜리오는 애플 캠퍼스 본사 빌딩인 시니 센터 3에 들어섰다. 

스핀들러는 자신의 스탭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알려주는 마지막 회의중이었다. 그 때, 영향력 있는 행정 보조인 데이비드 세다(David Seda: 스핀들러의 이름으로 여러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는 루머가 있다)를 포함한 그의 미래 스탭들 대부분이 스핀들러가 나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500일에 걸친 그의 임기 첫 번째 날은 자리 잡기와 조직도 익히기부터 시작하였다. National에 있던 그의 오래된 매킨토시 8100/110도 애플로 옮겨와서 네트워크에 꽂혔다.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애플의 새 전략에 대한 자세한 백서 제출이었다. 다만 저렴한, 그러면서 팔리지도 않는 맥으로 시장을 채운다는 전략은 제외됐다. 자신의 스탭진들과 잘 몰랐던 아멜리오는 그런 문서를 잘 만드는 사람을 외부 영입하였다. Rockwell에 있을 때부터 잘 알던 마이크 타운센드(Mike Townsend)였다.

백서의 결론은 스핀들러 시대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이윤 마진이 큰 제품을 훌륭하고,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내어 놓는다. 계획 실행을 위해서는 그동안 적자로 인해 빠르게 소진해가던 현금고를 다시 쌓아야 한다.

백서는 또한 5억 달러 규모의 사채(社債) 발행도 제안하였다. 이 계획 실행을 위해, 아멜리오는 그라찌아노를 대신할 새 CFO로서 프레드 앤더슨(Fred Anderson)을 고용하였다.

그런데 그가 National Semiconductor에서 데려온 사람은 마이크 타운센드 뿐이 아니었다. 엘렌 한콕(Ellen Hancock)이 있다. 그녀는 IBM의 수석 경영자로서도 명성을 갖고 있었다. 아멜리오는 그녀를 National이 IBM과의 계약으로 새 디자인을 작업하고 있을 때 만났었다. 그 경영팀은 이 프로젝트에 서툴렀고, IBM은 계약 취소 비용 500 만 달러 지불을 거절했었다. 당시 한콕은 파트너쉽을 망치지 않기 위해 자리를 옮겼고, 결국 National은 취소비용 500만 달러를 받아냈다. 아멜리오가 애플로 가자, 한콕도 애플로 왔고, 그녀는 애플의 새 CTO가 되었다. 

애플 최고 경영자 회의 초반은 아멜리오에게 충격이었다. 몇 주일 전에 이미 예고를 했는데도 그들은 자기 부서의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그들이 말한 것도 긍정적인 부분이 거의 없었다. 매 분기 수백만 달러를 잃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아멜리오의 애플의 인식은 정해졌다. 썬이 인수했다 하더라도 애플 문화에 깊은 문제가 있는 한, 그리고 사업 계획이 풀리지 않는 한,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애플 자신이 이 문제를 풀지 않는다면, 어떤 다른 회사도 애플을 살릴 수 없었다. 

아멜리오는 썬과의 협상을 깨고, 자신의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A New Deal for Apple 

아멜리오는 애플의 사채 판매 준비를 위해 프레드 앤더슨과 공동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그 일정이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마이크 타운센드는 애플이 4월 정도에 지불 불능 상태가 되리라 예측했었다. 즉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은 두 달이었다. 

보통이라면 최고 경영자가 전국을 누비면서 잠재 구매자들에게 2~3 주일동안 프리젠테이션을 펼친다. 그 후 마지막 프리젠테이션 이후 한 달정도 일정을 잡아서 구매하도록 한다. 그러나 타운센드의 말이 맞다면, 아멜리오에게는 그럴 시간 여유가 업었다. 게다가 막 들어온 이 회사를 그런 오랜 기간동안 비울 수도 없었다. 

이때 애플의 재정 담당 회사였던 골드만 삭스의 컨설턴트, 류 콜맨(Lew Coleman)은 동부 장이 마감된 직후에 열리는 컨퍼런스를 통해 하루 이내에 사채를 팔 수 있으리라 주장하였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미국내 어떤 회사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으나, 콜맨은 확신했다. 애플 이사진들도 반대했었다. 이사진들은 3월 하순까지 이 계획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애플과 아멜리오에게는 다행히도, 매출량이 올라갔다. 따라서 컨퍼런스는 1995년 6월 3일날 열렸는데, 애플의 지급 능력은 거의 빠듯하기는 해도 있기는 있었다. 

오후 4시에 시작한 컨퍼런스에서 아멜리오는 수 시간동안 애플 미래 전략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벌였고, 프레드 앤더슨은 애플의 재정 상태와 목표치에 대해 말해 주었다. 잠들 수 없는 그날 밤이 지난 후, 골드만삭스 사람들은 오전 10시에 계약을 맺었고, 애플은 6억 6100만 달러의 사채를 판매하였다. 적어도 1997년까지는 버틸만한 정도의 액수였다. 

Quality Control Problems

짧은 기간 안에 재정 상태가 양호해지자, 애플은 이제 그 관심을 결함있는 제품들에 돌렸다. 품질 문제는 거의 없었다. 전체 제품 중 약 10%만이 수리나 교체를 받았지만 그것도 워런티 가간 내에 있었다. 하지만 디자인 결함 문제가 있었다. 제일 잘 알려진 두 가지 사례는 퍼포마6400과 파워북5300이었다. 

6400은 가정용 컴퓨터 허브로 만들어졌고, 강력했으며, 소프트웨어 번들도 많았다. 또한 서브우퍼도 갖추고 있었다. 미니타워로 만들어진 6400은 조립이 가능한 애플의 첫 번째 소비자용 데스크톱이었다. 

6400의 결함은 컸다. 시리얼포트가 하나 뿐이기 때문에, 모뎀과 프린터를 동시에 쓸 수 없다는 결함이었다. 그런 간과된 디자인때문에 아멜리오는 좌절했다. 제품 사양을 처음 정하는 엔지니어와 마케터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결함이었다.

품질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아멜리오가 CEO가 막 되려했을 때, 애플은 파워북5300에 대한 대규모 마케팅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마케팅부 수장인 삿지브 카힐(Satjiv Cahill:후에 Palm의 마케팅도 맡는다)은 대히트작이었던 톰 크루즈 주연의 미션 임파서블에 맞춘 캠페인을 만들었었다. 영하에서 주연쪽 편은 모두 파워북 5300을 사용하였고, 악당들은 모두 IBM 씽크패드를 사용하였다.

아멜리오도 이 계획에 반색하여, 5300이 빠르고 비싸며 품질 좋은 컴퓨터라는 인식을 갖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출하일 며칠 전에, 5300이 싱가포르 공장에서 폭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멜리오는 그 일이 싱가포르만의 문제이기를 바랬고 곧 싱가포르 플랜트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애플 파워북 공정에서 모두 일어났다. 제품 생산은 중단됐고, 이미 출하한 1000 여 대의 5300은 회수됐다.

이 결함은 소니에서 나온 리튬이온 배터리 때문이었다. 이 재앙은 애플의 이미지까지 훼손시켰다.

몇 주일 후, 배터리가 교체되어 파워북이 나왔지만 그래도 결함있는 기종이 비율은 계속 등장하였다. 따라서 생산 수율이 낮았다. 5300 라인이 다 팔리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기껏 고가를 들인 마케팅 캠페인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실망한 아멜리오는 애플이 개발한 모든 제품을 재검토하였다. 몇 가지 보석(파워북 1400이나 파워맥 9600)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별로였고, 그런 제품이 나오리라는 희망도 거의 없었다.

제일 큰 사례는 바로 파워북 머큐리(Mercury)이다. 영업용으로 디자인된 이 노트북은 탈착이 가능한 디스플레이를 갖고 있어서 프리젠테이션용으로 분리하거나, 문서, 스펙 등을 확인할 때 손에 쥘 수도 있었다.

제품 자체는 멋졌다. 하지만 여기에도 결함이 있었다. 로직카드와 파워 서플라이, 배터리 모두가 디스플레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머큐리를 노트북으로 쓰기는 거의 불가능이었다. 컴퓨터가 뒤로 넘어질 판이었다. 따라서 아멜리오는 이 프로젝트를 즉각 취소시킨다. 

Copland

애플이 벌인 제일 큰 프로젝트는 코플랜드였다. 코플랜드는 맥 오에스에서 높은 차원으로 발전된 오에스였으며, PowerPC 상에서 IBM의 AIX나 OS/2보다 훨씬 더 못 돌아갔던 시스템 7과는 달리 훨씬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코플랜드는 기존 맥 오에스의 완전한 재작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 애플리케이션은 재작성할 필요가 없었다.

코플랜드 프로젝트에 대한 집중된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의 문제는 심각했다. 원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95와 맞붙기 위해, 1995년동안 나오기로 되어 있었던 코플랜드는 이미 출하가 일 년 뒤로 늦춰져 있었고, 완성과는 거리가 멀어 있었다.

아멜리오는 500 명의 직원들을 갖고도 코플랜드 프로젝트가 절대로 끝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는 새 운영체제를 찾기 시작했다. 첫 단계는 주로 클론 메이커들과의 계약을 충족시키기 위해 임시 변통의 맥 오에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 오에스의 업데이트에 대해서는 누구도 작업하고 있지 않았다. 전체 부서가 코플랜드에 매달려 있었다. 따라서 아멜리오는 스티븐 글라스(Steven Glass)를 임명하여 시스템 8부를 만들었다.

Mac OS 8

맥 오에스 8은 테마 기능이나 파인더, 플래티넘 테마 등 거의 완성되어 있었던 코플랜드 기능을 포함시켰다. 새 오에스가 나왔기 때문에, 애플은 이제 클론 메이커들과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당시 클론 메이커들은 애플에게 새 고객들을 모셔오는 대신,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이엔드 시장에 대한 파워컴퓨팅 파워라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애플은 라이센스 비용을 다양화하였다. 로우엔드 급은 훨씬 낮은 라이센스 비용을 받고, 하이엔드는 더 높은 라이센스 비용을 받았다. 파워는 저항하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The Nees for a New OS

장기적으로 운영체제 문제를 풀기 위한 아멜리오의 두 가지 아이디어는 기존의 웍스테이션급 운영체제를 가진 외부 회사로부터 라이센스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었다. 

처음 선택은 윈도우즈 NT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PowerPC 상에서 돌아가는 윈도우즈 NT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애플 엔지니어들은 맥과 비슷한 인터페이스만 만들어내면 됐었다. 이렇게 하면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관계를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기업 사용자들에게 매킨토시를 새로이 자리매김할 수도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증한다면 분명 맥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아멜리오는 이미 그 아이디어에 즉각적으로 호감을 표시한 빌 게이츠에게 개인적인 전화까지 걸 정도로 이 아이디어는 발전하였다. 게이츠는 수백 명의 마이크로소프트 엔지니어들을 애플에게 보내주겠노라 약속하였고, 퀵드로우를 윈도우즈 NT로 포팅하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처음 퀵드로우와 퀵타임을 인텔 x86 하드웨어에 포팅시켰던 프로젝트, 스타트렉(Star Trek) 팀이 한다면 더 쉽게 될 터였다. 

그런데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홍보였다. 맥 커뮤니티는 완전히 반-마이크로소프트였고 애플도 그러했다. 두 번째는 기존 애플 하드웨어 상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의 완전한 재작성 문제였다. 윈도우즈 NT가 메모리에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이 문제였다. 

아멜리오가 고민한 다른 운영체제는 솔라리스였다. 솔라리스는 AT&T UNIX와 BSD의 연합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완벽한 멀티태스킹과 보호메모리를 갖고 있었다. 솔라리스의 문제는 그래픽 시스템이었다. 여기에도 퀵드로우를 돌리려면 완전한 재작성이 필요하였고, 썬은 마이크로소프트만큼 자원을 투입할 여력이 너무나 적었다. 

게다가 기존 솔라리스의 GUI는 완전히 맥과 달랐다. Motif와 X11을 기반으로 하는 CDE(Common Desktop  Environment)는 정말 못났었다. 넥스트스텝이 3D 위젯을 유행시키기 시작했을 90년대 초반 솔라리스 GUI는 거의 화강암 수준이었다. 

아멜리오는 솔라리스도 아니라고 확신했지만, 한콕의 생각은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솔라리스를 종용하였지만, 아멜리오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Plan A Instead of Plan B

여기에 쟐-루이 가세(Jean-Louis Gassée)가 끼어들었다. 잡스가 떠난 후 매킨토시를 감독한 전임 애플 중역이었던 그는 존 스컬리가 CEO가 된 직후에 애플을 그만두고 여러 애플 엔지니어들과 Be를 설립했었다.

7년 동안 실제로 나온 제품이 없었던 비이지만 비오에스만큼은 평이 좋았다. (그리고 비 오에스 역시 개발중이었다.) 가세는 애플 내부에 지지자가 여전히 많았고, 애플이 운영체제를 찾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아멜리오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안을 하였다. 

아멜리오도 가세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서, 그와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을 꺼려 하던 차였다. 그래도 그는 가세가 설명을 할 기회를 주었다. 

가세는 전임 애플 엔지니어, 스티브 사코만(Steve Sakoman: 뉴튼 프로젝트의 창시자이다)과 함께 비오에스를 돌리는 파워 타워 맥 클론을 가져왔다. 아멜리오는 비오에스의 속도에 놀랐고, 이미 맥 하드웨어 상에서 돌아간다는 사실에 기뻐하였다. 

그러나 가세는 여전했다. 가격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때, 가세는 돈에는 상관하지 않는다면서, 비 이사진들에게 공정가를 맡겼다. 아멜리오는 회사 가치에 기반하여 5천만 달러 정도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비 이사진은 3억 달러가 넘는 가격을 제시하였다. 

누구도 언론에 그 이야기를 노출시키지 않았지만, 이 계약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의 제안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애플의 성공적인 사채 판매와 강력했던 파워북 1400의 매출량덕택에 애플은 여전히 여러 기사의 성공 사례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8월 7일, 맥월드 보스턴에서 그 분위기는 정점에 올랐다. 아멜리오는 여기에서 첫 번째로 연설을 하였다. 

연설도 믿을 수 없으리만치 대성공이었다. 19000 명이 넘는 이들이 아멜리오의 연설을 직접 보았고(홀 안에서나 폐쇄형 텔레비전으로),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USA 투데이같은 전국지에 주요 기사로 실려 나왔다. 

아멜리오는 애플에 대한 확신을 피력하였고, 두 가지 중요 발표를 하였다. 첫 번째는 전체 퍼포마 라인의 20% 가격 인하였다. 이로써 로우엔드급 퍼포마 5300은 1499 달러, 하이엔드 퍼포마 6500 Avid Edition은 2499 달러로 값이 내려갔다. 

두 번째 발표는 2500만 달러의 흑자였다. 

NeXT

넥스트 또한 여전히 잡스에게 충성스러워하는 내부 직원들로부터 애플이 운영체제를 검색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게다가 비가 실패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맥월드 컨퍼런스 동안 넥스트의 마케팅 부장은 한콕에게 넥스트와 스티브 잡스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들은 11월 26일, 넥스트스텝과 애플에 대해 논의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스티브 잡스가 모른 채로 진행됐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잡스는 기꺼워하였다. 자신도 애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넥스트와 애플은 매일같이 회의를 진행하였고, 넥스트스텝으로 맥 오에스를 교체하는 데에 따르는 기술적인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동안 애플은 수 천 명의 전직 넥스트 개발자들과 고객, 직원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넥스트가 허풍인지를 판별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확인 작업이 끝났고, 고위중역들은 이제 넥스트스텝의 라이센스를 논하기 시작하였다. 

Scandal

비와의 계약이 실패하였다거나 넥스트와 협상중이라는 소식을 언론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애플의 당시 이미지는 긍정적이었다. 아멜리오도 스캔들이 터진 1996년 말까지는 이미지가 좋았다. 이 스캔들은 아멜리오의 선의마저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멜리오는 오랜동안 열정적인 아마츄어 파일럿이었으며, 자기 소유의 제트 비행기로 애플 일도 했었다. 하지만 애플 일을 무료로 하게 놓아두는 대신, 그는 따로 Aero라는 독립 회사를 차려서 애플에게 주유료와 유지비용을 대게 하였다. 

언론은 이를 듣고 크게 확대시켰다. 애플이 자사 CEO의 제트기에 대해 시간 당 1695 달러를 지불하고 있으며, 일 년에 10만 달러 이상을 낸다는 기사였다. 거기에 덧붙여서 애플이 아멜리오에게 500만 달러의 빚을 지도록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도 나왔다. 포위된 회사로부터 단물을 빨아들인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그는 계약 내용을 호도시키려 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명성은 추락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 12월 10일, 아멜리오는 스티브 잡스, 쟝 루이 가세와 같이 만났고, 두 명 모두 자신만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멜리오와 그의 중역들은 그날 최종 결정을 내린다. 

스티브 잡스는 열정적이었다. 그는 넥스트스텝의 진보된 기능을 맥 사용자들이 쓰면 얼마나 굉장할지 사례를 들었고, 옆에는 넥스트스텝의 맥 포팅의 기술적인 측면을 설명해줄 티베이니언도 같이 있었다. 

그러나 가세의 프리젠테이션은 거의 프리젠테이션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계약이 맺어졌다고 결론내리고 있었으며, 아멜리오와 그의 팀에게 자기 엔지니어들이 이미 거론한 것 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하였다. 아멜리오는 결국 넥스트에 급속히 기울게 된다. 

다음 이사진 회의 때(바로 며칠 후였다), 아멜리오는 넥스트의 인수를 제안하였고, 잡스는 넥스트스텝의 데모를 선보였다. 15년 도 더 지났지만, 잡스가 마이크 마큘라(그는 1985년 잡스 축출을 결정내린 사람이었다)와 인생 최초의 악수를 한 순간이었다. 

이사진은 넥스트의 가격에 대해 우려하였지만 아멜리오는 넥스트 인수를 발표하도록 허가내렸다. 아멜리오와 잡스는 잡스 집에서 개인적으로 따로 만나기도 하였다. 

Jobs’ Return

잡스는 인수에 대해 몇 가지 우려를 표시하였다. 첫 번째는 회사 내에서 잡스의 지위였다. 그는 새 애플에서 몇 가지 역할을 원했고, 아멜리오는 그가 운영체제부를 이끌게 되리라 알려주었다. 둘째로, 잡스는 자신의 두 외부 후원자, 로스 페로(Ross Perot)와 캐논이 과연 넥스트를 애플에게 시장가로 판매할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투자자금을 넥스트가 잃고 있던 시절이었다. 

최종 인수가는 주당 10 달러인 전체 4억 달러에 결정되었다. 아멜리오의 해명은 다음과 같았다. 애플이 완전한 운영체제를 사는 것 뿐만 아니라, 스티브 잡스와 300 명의 유능한 인력, 그리고 웹오브젝트와 오픈스텝에서 나오는 연간 5천만 달러의 수입도 포함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규모 투자자들은 애플 주가보다는 현금으로 완전 보상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멜리오는 잡스가 애플에 대한 확신감의 표시로서 애플 주식을 갖기를 요구하였다. 이로써 잡스는 150만 주(적어도 6개월 이상은 갖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현금 1억 2천만 달러를 받게 되었다. 

잡스는 아멜리오에게 곧 복수하게 된다. 

4억 달러에 달하는 인수금에 대한 이사진의 반발이 예상되자, 아멜리오는 애플이 현재 운영체제 전략을 갖고 있지 않으며, 넥스트야말로 지금까지의 선택 중에 최선이라 지적하였다. 이사진들은 꺼리는 기색으로 결국 넥스트와 넥스트스텝을 선택하였다. 

이 때가 바로 12월 20일, 공식적인 인수가 나기 몇 주일 전이었다. 

인수 발표가 나자, 잡스는 아멜리오에게 커브볼을 던진다. 엔지니어링부 이끌기를 거절한 것이다. 충격을 받은 아멜리오는 잡스에게 사장(마이크 마큘라) 조언자역을 제의하였고, 잡스는 이를 승락하였다.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하자, 아멜리오는 언론 앞에 서서 애플이 “플랜 Be 대신 플랜 A를 선택했다”고 말하였다. 

Disaster Strikes in San Francisco

그러나 성탄절 시즌과 새해는 아멜리오에게 있어서 재앙이었다. 

맥월드 샌프란시스코가 다가오고 있었으며, 애플은 새 운영체제 전략을 써드파티의 여러가지 소프트웨어와 같이 선보여야 했다. 

게다가 두 명의 유명인사가 초청되었다.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가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새 웹사이트에서 직접 보여준다는 내용과 파워북 5300, 그리고 파워북 1400의 홍보용 영화, 인디펜던스데이의 주인공 제프 골드블럼(Jeff Goldblum)이 나와서 영화 제작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안 좋았다. 신속하게 연설이 나가는 대신, 아멜리오가 하나 하나 자세히 다 이야기 해야 했다. 아멜리오에 따르면 대필자(그의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가 일정에 늦어서 사과를 했다고 한다. 원고 수정은 쇼 시작 전까지 계속되었다. 

더군다나 연설문을 담고 있어야 할 TelePrompTer가 오작동하였다. 

프리젠테이션을 맡은 다른 이들도 잘하지 못하였다. 누구도 그들에게 언제 무대에 오를지, 어떻게 서서 카메라에 맞출지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TelePrompTer의 오작동때문에 아멜리오는 애드립으로 출현 순서를 정해야 했고 결국은 무하마드 알리를 빼먹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연설도 원래 1 시간 반정도였는데, 3 시간을 채웠다. 마지막에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의 등장이었다. 

맥월드 샌프란시스코는 재앙이었으며, 그 한가운데에 아멜리오가 있었다. 언론은 그의 안 좋았던 상태로 그날 기사를 채웠고, 그의 말투를 흉보았다. 아멜리오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당황해하고, 그 책임을 졌다. 나중에서야 그의 술수 대다수는 다른 이들의 실수때문이었음이 밝혀졌다. 

Redemption 

주주회의는 2월 6일이었고, 여기에서도 곱게 지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가을 초반기의 흑자도 결국 적자로 탈바꿈하였다. 1996년의 마지막 분기는 재앙이었다. 애플이 이때 잃은 돈은 애플 역사상 최대였다. 아멜리오는 몇 달 전만해도 흑자를 장담했었다. 그러나 애플은 여전히 출혈중이었다. 

투자자들의 마음을 손실에서 돌리기 위해, 아멜리오는 프리젠테이션을 맡은 모두가 확실히 준비를 해 둘 것을 일러두었다. 보너스와 급여를 받는만큼 일한다는 그 선의를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였다. 아멜리오는 여기에 외부 조언자로서 해롤드 버슨(Harold Burson)을 불러들였다. 안 좋은 성적의 발표 충격을 완화시키고 연설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는 별다는 일이 없었다. 모두가 일정대로였고 심지어 원래 예정 시각보다 회의가 5 분 전에 끝났다. 애플의 장기 운영체제 전략과 넥스트 인수에 대한 설명을 청중들은 인내심을 갖고 들었다. 

마침내 아멜리오의 계약(백만 달러 어치의 스톡 옵션과 백만 주, 그리고 연봉을 60만 달러로 줄임) 수정에 대한 투표가 있자, 투자자들은 이를 90%의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이는 CEO에 대한 신임의 확인이었다. 

Mac Linux 

이 때 애플은 최초로 실험적인 운영체제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바로 MK Linux이다. MK 리눅스는 마이크로커널 프로그래밍의 연습이었고, 오픈소스커뮤니티에 대한 통로이기도 하였다. 이 리눅스는 마흐 마이크로커널 상에서 돌아가는 리눅스 커널이었다. 

이론상 어떠한 운영체제도 마흐 마이크로커널상에서는 상대적으로 쉽게 돌릴 수 있다. 사실 PowerPC용 OS/2 또한 마이크로커널 상에서 OS/2 커널을 돌린 것이었다. 오픈소스 커뮤니티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놀라워했다. 리챠드 스톨만(Richard Stallman)은 이렇게 평했다. “무료 운영체제를 애플이 만들어내다니 정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Reorganization

회의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이 필요했다. 아멜리오는 흑자로 돌아오기 위해 각 분기마다 2억 5천만 달러의 비용 절감이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여기에는 직원 해고 뿐만이 아니라, 이윤이 없는 프로젝트의 취소, 회사 구조의 재조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맞지 않는 제품들은 포기하였고, 이중적인 프로젝트는 취소시키면서 회사를 단순화시킨 구조로, 임무별로 나누었다. 

또한 아멜리오는 이 기회에 무능하거나 비효율적인 것으로 자신을 판단내린 중역들도 퇴진시키기로 결정내렸다. 심지어 카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도 제일 중요한 퇴딘은 판매부인 미주지부장 마르코 란디(Marco Landi)일 것이다. 그는 가격 인하를 용인했었고, 정말 마찰이 심했으며, 부하 직원들에게 고함을 내거나 서열을 무시했었다. 

3000 명이 넘는 직원들이 해고당하였고, 이로써 약 6000 명의 직원들이 일 년여 동안 해고당하게 되었다. 

Mistakes 

아멜리오가 구조 재조정과 여러가지 실수에 대해 회사 내외를 신경쓰고 있을 때, 잡스는 넥스트 엔지니어들을 애플 곳곳에 배치시킨다. 사실 잡스의 오랜 목표는 엘렌 한콕이었고, 그녀는 결국 MK 리눅스와 넥스트스텝의 기반이 된 마흐 마이크로커널의 창시자 중 하나인 에이비 티베이니언(Avi Tevanian)으로 교체된다. 

또다른 넥스트 베테랑인 존 루빈스타인(Jon Rubenstein)도 하드웨어 부서를 맡게 된다. 

그런데 4월동안 기묘한 사건이 두 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사건 모두가 잡스를 향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에 의한 애플 적대적 인수 사건이다. 스티브 잡스의 친구인 엘리슨은 오라클의 CEO이며, 더미 터미널을 치장한 “네트워크 컴퓨팅”을 홍보하기 시작한 차였다. 그는 애플이 NC 제조를 시작하기 바랬고, 혁명을 이끌려 하였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투자자들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노력은 중단된다. 

아멜리오와 잡스가 Gaylords에서 채식주의자식 저녁을 같이 한지 3일 후, 아멜리오는 증권위원회로부터 언질을 받는다. 한 주주가 애플 주식 150만 주를 매각했다는 매우 무례한 내용이었다. 

The Second Coming of Steve Jobs

아멜리오는 즉각적으로 이 주식을 매각한 자가 잡스가 아닌가 의심하였지만, 잡스는 단호히 부정하였다. 아멜리오는 그를 종용하였고, 끝내 잡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인정하였다. 그리고서는 거짓 사과를 하였다. 애플을 살리려고 아멜리오가 데려온 사람이 자신을 뒤에서 찌르려는 것이었다. 잡스는 아멜리오 하에서의 애플에 대해 신임하지 않았다. 

잡스의 불신임 투표 이후, 빌 게이츠도 아멜리오를 방해하였다. 아멜리오는 게이츠가 차세대 운영체제인 랩소디용 오피스(맥용 오피스의 당시 년당 판매액은 3억 달러 정도였다)를 계속 만들게 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게이츠는 깨끗이 거절하였다. 심지어 아멜리오가 모든 맥에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번들하겠다고 제안해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넉 달 후, 게이츠는 잡스의 훨씬 더 안 좋은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임기 499일 째, 아멜리오는 안 좋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사인 에드 울라드(Ed Woolard)가 7월 4일 가족 모임에서 아멜리오를 불러 이 소식을 전하였다. 아멜리오가 축출되고, 프레드 앤더슨이 알맞는 CEO를 찾을 때까지 애플을 맡는다는 소식이었다. 

아멜리오는 침묵하였다. 다음 날, 500일 째 되는 날 그는 짐을 싸고 인사를 하는데에 시간을 보냈다. 

http://lowendmac.com/orchard/05/1221.html

위민복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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